Search
Close this search box.
Search
Close this search box.

서퍼들의 아버지 잭 오닐(Jack O’Neill)의 이야기

잭 오닐은 1923년 3월27일 미국 덴버에서 태어나 남부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자랐다. 10대 시절 그곳 해안에서 보디서핑(서프보드 없이 가슴과 배로 파도를 타는 것)을 시작으로 바다에서 모든 삶을 누렸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해군 파일럿으로 복무했고, 1949년 오리건주 포틀랜드대학을 경영학 전공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2017년 6월 1일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 해변의 자택에서 숨졌다. 잭 오닐은 잠수복 판매로 백만장자가 됐지만 죽기전 때로 자신의 사업적 성공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오닐은 “나는 좋아했던 많은 해변을 사람들로 북적이게 만든 혐의를 받는다”며 “사람들은 자신만 아는 파도를 갖고 싶어 한다”고 아쉬워 했다.

“단지 서핑을 더 오래 하고 싶었다”

바다를 사랑한 탐험가이자 서퍼가 남긴 유산 ‘웻슈트’
서핑 광고 카피의 고전 ‘웻슈트 안에서는 언제나 여름’
서핑 문화 확산을 만들어 낸 잭 오닐

 

잭 오닐(Jack O’Neill)이 보유한 타이틀이 꽤 많다.

바다를 사랑하는 탐험가, 환경 교육자, 세계 최초로 서핑샵을 오픈한 서퍼, 그리고 서핑 세계에 혁명을 일으킨 웻슈트(wetsuit)를 만든 서퍼이자 자신의 이름을 딴 ‘잭 오닐’이라는 캘리포니아 기반 서핑 브랜드를 만든 사업가.

그 중 그가 서핑 세계에 혁명과 다름없는 유산을 남긴 것이 있다면 웻슈트가 꼽히지 않을까.

웻슈트의 탄생 배경은 1952년 잭오닐의 기발한 생각에서 출발됐다. 단지 서핑을 더 오래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던 한 서퍼의 생각이다.

70년 이상 서핑 브랜드 ‘오닐’의 작업에 영감을 준 ‘오랫동안 서핑을 즐길 수 있는 무언가’ 그래서 더욱 그가 남긴 웻슈트는 지금까지도 서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대체 불가능한 아이템이 아닐까.

사실 서핑의 역사는 2쳔 년 전에 시작된 아주 오래된 해양 스포츠다. 타히티 폴리네시아인 조상이 시작해 하와이로 전해졌고, 하와이에서 오랫동안 전통놀이로 이어져왔다.

1950년대 초만 해도 서핑은 여전히 하와이와 폴리네시아(태평양 중남부에 산재하는 작은 섬들) 지역 해안으로 제한됐다. 가장 큰 이유는 그 일대가 1년 내내 따뜻한 수온을 유지하는 몇 안 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서핑이 전 세계로 확산된 데는 잭 오닐의 공이 컸다.

그는 차가운 물속에서도 오래 견딜 수 있는 현대의 웻슈트를 개발, 대중화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정설에 반박하기 힘들 것이다.


웻슈트의 탄생 배경은 이렇다.

잭 오닐은 서핑보드를 파는 샌프란시스코 세계 최초의 서핑 숍을 연 이후 2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군들이 사용한 잠수복을 구성하는 방수 재료를 사용한 스포츠웨어를 테스트했다.

차가운 물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하며 실용적인 방법으로 해군 잠수복 소재를 눈여겨 본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퍼들은 셔츠에 기름기를 품은 스프레이 물질을 사용하거나 두꺼운 모직 점퍼를 입는 것으로 만족했다.

수온이 떨어지는 시기에는 고무 비닐로 안감 처리한 트렁크나 기다란 속옷, 울스웨터를 입고 바다에 들어갔다. 외관상 조금 더 따뜻해 보일 뿐 실제 보온에는 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서핑 뒤 파랗게 질린 몸을 덥히려고 해변에서 폐타이어를 태우곤 했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서퍼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1950년대 그때만 해도 서퍼들은 현대 기술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 통나무를 잘라 보드를 만들어 탔고, 서핑을 한 뒤 아무 유목이나 잡아타고 해변가로 돌아왔다.

세계 최초의 네오프렌 소재의 ‘오닐’의 웻슈트가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다. 지금은 모든 서퍼의 옷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아이템이 됐다.

오닐이 네오프렌 소재 잠수복의 ‘발명자’는 아니다. 미국 정부의 핵무기 개발 계획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물리학자 휴 브래드너가 개발했다.

단지 잭 오닐은 서퍼의 관점에서 군인들의 잠수복을 재해석한 것이다.

이렇게 최초의 서퍼 웻슈트가 서핑 시장에 출현한 이후 잭 오닐은 초기 웻슈트 보다 더 편안한 형태로 해마다 개선하며 최상의 완벽한 구조로 만드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경쟁자들과 많은 브랜드가 오닐의 혁신적인 웻슈트를 모방하려고 노력했지만 결코 같은 수준의 품질에 도달하지 못했다.

잭 오닐은 살아생전 했던 말 중 “우리가 최고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가장 많이 복제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그가 만든 세계 최초의 웻슈트가 그만큼 완성도가 높았다는 것을 부연한다.

서핑 백과사전의 저자인 서핑 역사가 매트 워쇼는 워싱턴포스트에 “잠수복 자체가 역사상 어떤 서프보드 디자인보다 더 많은 사람을 물에 뛰어들게 했다”고 말했다.

오닐은 특유의 자유로운 정신, 탐험가 이미지와 마케팅 기술로 잠수복을 전세계에 대중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닐사는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큰 잠수복 제조사가 됐다. 오닐의 아들 펫이 1985년부터 운영해온 이 사업은 현재까지 전세계 잠수복의 약 60%를 생산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닐이 초창기부터 내세운 ‘옷 안에선 언제나 여름’(It’s always summer on the inside)이라는 슬로건은 광고업계의 고전이 됐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모험가 이미지를 갖고 있던 오닐은 해변에서 거대한 항공모함을 끌고 다니며 ‘오닐’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열기구를 직접 조종해 띄우거나 요트를 탔다. 사람들은 그를 이 잠수복의 ‘상징’으로 기억했다.

오닐은 1970년대 보드리시(보드용 줄) 시제품을 테스트하던 중 사고로 보드에 얼굴을 맞아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이후 남은 삶 동안 한쪽 눈에 검은 가죽 안대를 하고 다녔다. 무성한 턱수염과 가죽 안대를 찬 그의 얼굴은, 오랫동안 오닐사의 로고로 사용됐다. 해적 이미지의 얼굴은 인기를 끌었고 오닐 브랜드는 더 강력해졌다.

잭 오닐은 1923년 3월27일 미국 덴버에서 태어나 남부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자랐다. 10대 시절 그곳 해안에서 보디서핑(서프보드 없이 가슴과 배로 파도를 타는 것)을 시작으로 바다에서 모든 삶을 누렸다.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해군 파일럿으로 복무했고, 1949년 오리건주 포틀랜드대학을 경영학 전공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2017년 6월 1일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 해변의 자택에서 숨졌다.

잭 오닐은 잠수복 판매로 백만장자가 됐지만 죽기전 때로 자신의 사업적 성공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오닐은 “나는 좋아했던 많은 해변을 사람들로 북적이게 만든 혐의를 받는다”며 “사람들은 자신만 아는 파도를 갖고 싶어 한다”고 아쉬워 했다.